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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장모를 위로하러 간 날 3

주소야 (1.♡.26.178) 5 235 0 0 2026.10.07

외로운 장모를 위로하러 간 날 3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수진의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 안방에서 발견했던 흔적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떨어져 있던 낯선 머리카락.

자신이 없는 사이 남겨진 얼룩.

무엇보다 너무나 익숙했던 엄마의 향수 냄새.

남편은 억울하다는 듯 모든 것을 설명했다.

혼자 잠을 자다가 생긴 흔적이라고 했다.

엄마의 향수는 우연히 방에 뿌린 것이라고 했다.

머리카락 역시 얼마 전 친정에 다녀오면서 옷에 붙어왔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수진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친엄마와 자신의 남편이 관계를 맺었다는 끔찍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남편의 설명을 믿는 편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생긴 의심은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 출근해서도 계속 생각났다.

환자를 확인하다가도 문득 떠올랐다.

간호기록을 작성하다가도 그 냄새가 생각났다.

‘내가 정말 잘못 맡은 걸까.’

‘그게 정말 엄마 향수가 아니었을까.’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데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까지 겹쳤다.

결국 수진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렸다.

평소라면 웬만큼 아파도 참고 출근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결국 하루 병가를 냈다.

집에 혼자 있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생각만 많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엄마 얼굴이나 보고 오기로 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빵집에 들렀다.

엄마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개 골랐다.

커피도 두 잔 샀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진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친정으로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일 낮이었다.

처남 부부는 모두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수진은 익숙하게 친정집 문을 열었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수진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나 수진이야.”

그런데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수진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며칠 전 자신의 침실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수진의 표정이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안방 쪽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평생 자신이 알고 지낸 엄마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였다.

수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의 장면들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침대 위의 머리카락.

남겨진 흔적.

엄마의 향수 냄새.

그리고 자신의 추궁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냈던 남편.

그 순간 모든 조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것 같았다.

툭.

손에 들고 있던 빵 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피도 함께 떨어졌다.

뚜껑이 벗겨지면서 바닥으로 내용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수진에게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쾅.

방 안의 시간이 그대로 멈췄다.

나와 장모 역시 얼어붙었다.

그날 수진이 병가를 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다.

당연히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남 부부도 출근한 상태였다.

우리는 아무도 올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와서는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수진이었다.

“엄마……?”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시선이 내게 향했다.

“당신……?”

그 두 마디에는 충격과 분노와 배신감이 전부 섞여 있었다.

더 이상 변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 전 침대에서 발견했던 흔적의 의미가 그 순간 수진의 눈앞에서 완전히 드러났다.

머리카락도.

향수 냄새도.

내가 늘어놓았던 설명도.

모든 것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장모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수진아.”

목소리가 떨렸다.

“수진아, 잠깐만.”

장모는 다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모가 딸에게 다가갔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눈물이 쏟아졌다.

“김 서방은 원망하지 마라.”

“내가 외로워서 정신이 나갔던 거야.”

장모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수진에게 들어갈 리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수진아.”

수진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잘못했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나는 오히려 가장 비겁한 변명을 꺼냈다.

우리 부부 사이가 오랫동안 멀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계속 외로웠다는 말도 했다.

당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를 계속 밀어냈던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서 장모와의 관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어떻게든 책임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수진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분노보다 더 무서운 표정이었다.

환멸이었다.

자신의 엄마와 남편을 번갈아 바라보던 수진이 입을 열었다.

“그만해.”

장모가 울음을 삼켰다.

“수진아.”

“엄마도 그만해.”

수진은 장모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당신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추해.”

그 한마디가 오히려 고함보다 아팠다.

그런데 수진은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위기 상황이 생기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던 사람이었다.

그 성격은 자신의 가정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대로였다.

수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단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친척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직장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처남 부부가 알게 되면 가족 전체가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의 남편과 엄마의 관계라는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수진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밖에 말하지 마.”

나는 수진을 바라봤다.

“수진아.”

“말하지 말라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장모 역시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수진의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당신하고 나.”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로 끝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문 안 나게 서류는 조용히 협의로 진행해.”

수진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엄마를 봐서라도 소송까지 가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우리의 결혼생활은 끝을 향하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아내와의 멀어진 부부관계에서 시작된 내 불만.

남편을 잃고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장모의 외로움.

처음에는 각자의 마음속에 따로 존재했던 감정이었다.

그런데 두 감정이 잘못된 방식으로 만났다.

그리고 결국 그 결과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수진이 직접 목격했다.

그 뒤 이혼 절차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수진다운 방식이었다.

감정적인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필요한 이야기만 했다.

재산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언제 법원에 갈 것인지.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이혼했다고 설명할 것인지.

수진은 마치 병원에서 업무를 처리하듯 하나씩 정리했다.

나는 죄인처럼 수진이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했다.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그 밖에 협의이혼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각종 자료들.

그러던 중이었다.

가족관계와 과거 기록을 확인하다가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내가 서류를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확인했다.

그래도 이상했다.

장모와 수진의 관계였다.

나는 당연히 장모가 수진과 처남의 친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결혼할 때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가족 누구도 내게 다른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알고 있던 가족관계와 기록이 맞지 않았다.

수진과 처남이 장모의 친생자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행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옛날 기록이라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 기록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났다.

수진과 처남은 돌아가신 장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장모라고 불러온 사람은 두 사람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장인이 전처와 헤어진 뒤 새롭게 만나 재혼한 사람이었다.

즉 수진에게는 새어머니였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결혼한 뒤 수없이 처가를 드나들면서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장모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뒤늦게 조금씩 알게 됐다.

장인을 만나기 전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장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 뒤 어린 수진과 처남을 오랫동안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며 살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서류상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지난 몇 년 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처남 부부가 장모를 대하는 태도였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유독 차갑게 대하는 날이 있었다.

장모가 자기 집에서조차 눈치를 본다고 울면서 말했던 이유도 다시 생각났다.

당시에는 단순한 고부갈등이라고 생각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서운함이 쌓인 평범한 어머니의 하소연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가족관계의 오래된 사정을 알고 나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수진이 현장을 목격했을 때 보였던 태도도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소문을 두려워했는지.

왜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사건 자체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 가족 안에는 내가 모르던 훨씬 오래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류에서 발견한 사실이 내가 저지른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수진에게 장모가 친어머니인지 새어머니인지는 내가 결혼생활 중 저지른 배신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수진에게는 오랜 세월 자신을 키운 가족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결혼한 순간부터 그 사람을 장모로 알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그 사실은 서류 한 장으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격은 컸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믿었던 가족의 역사가 실제 기록과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동시에 장모가 왜 그토록 외로움을 호소했는지도 조금은 다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오랫동안 키웠던 자녀들은 모두 성인이 됐다.

그중 아들 부부와 한집에서 살았지만 정작 그 집에서 자신이 가족인지 남인지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나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 집에서 더는 못 살겠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단순히 며느리와 갈등을 겪는 어머니의 푸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 속에 훨씬 긴 세월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쪽에는 곧 끝나게 될 수진과의 결혼생활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이제껏 전혀 몰랐던 장모의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장모와의 관계를 단순한 금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고 그래서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서류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가족의 형태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법적인 기록과 사람이 살아오며 형성한 가족관계는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진이 장모를 평생 엄마라고 부르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사람을 장모라고 부르며 살아왔다.

무엇보다 수진이 받은 배신감 역시 서류상의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동안 장모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혈연인가.

법적인 가족관계인가.

아니면 오랜 세월 서로를 가족이라고 불러온 사회적인 관계인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다시 서류를 바라봤다.

종이 위에 적힌 몇 줄의 기록은 너무나 건조했다.

하지만 그 몇 줄 때문에 내가 알고 있던 한 가족의 역사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수진과의 결혼은 이미 끝을 향하고 있었다.

장모와의 관계 역시 세상에 드러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비밀 위에 또 하나의 비밀이 겹쳐졌다.

수진과 처남의 친어머니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그들을 오랫동안 키워온 새어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서류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이상하게도 수진이 아니었다.

장모였다.

남편을 잃은 뒤.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들이 모두 성장한 뒤.

그중 한 사람의 가족과 한집에서 살면서도 계속 눈치를 봐야 했던 사람.

그리고 어느 날 술에 취해 딸이라고 부르던 수진에게 울면서 더는 이 집에서 못 살겠다고 했던 사람.

그날 장모가 흘렸던 눈물이 이제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나 동시에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과 내가 저지른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서류는 가족의 숨겨진 과거를 보여줬을 뿐이었다.

이미 무너져버린 수진과 나 사이의 신뢰까지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이혼을 준비하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처가의 오래된 비밀까지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사실은 끝나가던 세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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