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을 탈출한 꽝
사이공을 탈출한 꽝
꽝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장 동료였다.
나보다 먼저 나이를 먹었으니 벌써 오래전에 직장에서도 퇴직했다.
지금은 서로 따로 살고 있어 일부러 연락해서 만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래도 가끔 시내 식당 같은 곳에 가면 우연히 얼굴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오래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리고 꽝이 술자리에서 하나둘 풀어놓았던 기구한 인생 이야기도 함께 떠오른다.
그의 인생을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전쟁과 공산화.
감화소 생활.
사이공에서의 젊은 시절.
보트를 이용한 탈출.
호주의 난민수용소.
미국에서의 난민 생활.
그리고 아이비리그 대학원까지.
그 굵직한 사건들 사이사이에 여자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어디에서 살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여자를 찾아내는 법인가 싶었다.
꽝은 그 긴 세월 동안 자기 나름의 ‘연애 연대기’를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이었다.
꽝의 집안은 베트남에서도 꽤 잘살았던 모양이다.
집안의 다음 세대 남자라고는 꽝 하나뿐이었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어린 시절에는 당시 부유층이나 권력층 자제들이 주로 다녔다는 사이공의 프랑스계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그가 들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금 기준으로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당시 집안의 생활상이나 임신을 둘러싼 민간신앙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어린 꽝은 그런 어른들의 세계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성장했다고 했다.
그러다 1975년이 왔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이었다.
그날을 이야기할 때 꽝이 의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보다 일단 총소리가 멈췄다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일지도 모른다.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매일 들리던 총성이 멈췄다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는 안도감을 줬던 모양이다.
하지만 총소리가 사라졌다고 곧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는 혼란 속에서 빨간 완장을 찬 자치대원 같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들과 일반 시민 사이에서 갈등도 자주 벌어졌다고 했다.
이후 공산당의 행정 통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렇게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됐다고 꽝은 기억했다.
꽝은 그런 혼란 속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사이공대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지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학생들과 모임을 만들고 이런저런 활동을 했다가 결국 당국에 붙잡혔다.
그 결과 감화소에서 약 2년을 보내게 됐다.
나왔을 때는 대학에서도 쫓겨난 상태였다.
젊은 시절의 중요한 몇 년이 한순간에 사라진 셈이었다.
그 뒤로 특별히 할 일 없이 지내던 시기에 한 여자를 알게 됐다.
젊은 여자 판사였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기존 국가 체제가 사실상 붕괴하면서 행정과 사법 조직 역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꽝은 설명했다.
그래서 새 체제에 필요한 판사나 검사 같은 인력도 짧은 기간 교육을 거쳐 충원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새 체제에서 판사가 된 사람이었다.
이미 결혼한 여자였고 아이도 하나 있었다.
남편은 새로운 권력과 사회활동에 몰두하면서 집을 자주 비웠다고 했다.
꽝과 그녀가 어떻게 처음 가까워졌는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감화소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주 마주치다가 친해졌다는 큰 줄기는 같았다.
두 사람은 결국 비밀스러운 관계가 됐다.
꽝에게 그녀는 단순한 연애 상대 이상의 의미도 있었다.
그녀의 보증 덕분에 필요한 증명서를 얻을 수 있었고,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통행의 자유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약 2년을 가까이 지냈다.
시간이 나면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회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꽝의 가족 역시 생활 기반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했다.
결국 집까지 잃게 됐다는 것이 꽝의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남아 있던 돈을 모았다.
그리고 집안의 다음 세대 남자라고는 하나뿐이었던 꽝을 어떻게든 베트남 밖으로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는 합법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배였다.
그 와중에도 꽝은 떠나기 전에 여자 판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기가 막혀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라를 탈출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여자부터 만나고 왔다는 것이 꽝다운 행동이었다.
한밤중에 배에 올랐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학생 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자였다.
과거에는 공산주의 관련 이야기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는데 정작 세월이 흐른 뒤 같은 탈출선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참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꽝은 사이공을 떠났다.
바다를 건넌 끝에 호주의 난민수용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약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배에서 다시 만났던 대학 시절의 여자와도 가까운 사이가 됐다.
전쟁과 탈출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는 외부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유대감이 생겼다고 꽝은 말했다.
특히 같은 배를 타고 탈출한 사람들끼리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어떤 가족은 탈출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거두기도 했다.
혈연관계가 없어도 형제자매가 됐다.
그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는 자신을 거두어준 어른들을 친부모처럼 부양하는 모습도 꽝은 여러 번 봤다고 했다.
생존을 함께한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든 셈이었다.
난민수용소에서 알게 된 여자 역시 훗날 호주 서부 지역에 정착했다.
하지만 꽝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미국에서도 난민 신분으로 약 1년 정도 생활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사이공대학교에 다녔던 경력과 난민으로서의 사정이 고려돼 미국 명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꽝의 표현으로는 난민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회 덕분에 학비 부담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전쟁 직후 감화소에서 2년을 보내고 배를 타고 나라를 탈출했던 사람이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친 것이다.
그것만 놓고 보면 상당히 극적인 인생이었다.
그런데 꽝에게 여자 이야기는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다.
호주에서도 그랬고 미국에서도 그랬다.
새로운 환경에 도착하면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수많은 인연 가운데 기억나는 사람 중에는 한국인 여자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난 여자였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동거까지 했다.
그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다.
그 뒤 꽝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국 중서부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곳에서 나와 같은 직장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와 꽝의 인연도 시작됐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주변 사람의 소개로 자신보다 네 살 많은 여자를 만났다.
결국 그 여자와 결혼했다.
이제는 꽝도 정착해서 평범하게 사는가 싶었다.
하지만 사람 버릇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결혼한 뒤에도 꽝 주변에는 끊임없이 여자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특히 베트남 교민 사회에서 알고 지내는 여자가 많았다.
꽝과 함께 베트남 식당에 가면 내가 장난을 치곤 했다.
식당에서 임신한 종업원이 보이면 괜히 꽝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야.”
“설마 너냐?”
그러면 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만큼 여자 문제로 장난을 많이 치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꽝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한 번 유산한 뒤로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부부가 그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이 각자의 생활방식을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월은 계속 흘렀다.
미국에 정착했던 난민 1세대도 하나둘 늙어갔다.
젊었을 때는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자식들도 부모를 나름대로 챙겼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민 1세대의 삶은 외롭고 힘들어 보였다.
특히 함께 건너왔던 부모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공백이 더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꽝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부모 세대가 세상을 떠났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꽝 부부도 차례로 은퇴할 나이가 됐다.
그 무렵 베트남 역시 크게 변하고 있었다.
새천년 전후로 베트남 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베트남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꽝 역시 장기 체류가 가능한 비자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베트남을 상당히 자주 오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인간 성격이면 현지에서도 가만있지는 않겠지.’
실제로 꽝은 어느 순간 아예 베트남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기 시작했다.
하노이에 있는 유명한 중·고등학교에서 외국인 교사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공산당 유력 인사들의 자녀도 많이 다니는 학교라고 했다.
사이공을 배 타고 탈출했던 난민이 수십 년 뒤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문득 젊은 시절 꽝과 가까웠다는 그 여자 판사가 생각났다.
그래서 물었다.
“그때 그 여자 판사는 다시 만나봤냐?”
꽝은 만났다고 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다.
꽝은 옛날의 추억은 그냥 옛날에 남겨두는 것이 낫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호주 난민수용소에서 가까웠던 사람들도 대부분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꽝은 그런 사람들의 과거를 굳이 다시 들추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대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는 편이 재미있다는 것이 꽝다운 결론이었다.
그렇게 베트남에서 몇 년을 보냈다.
내 기억으로는 대략 5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베트남 생활을 정리했다.
왜 그만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이제 충분히 살아봤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꽝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 사람의 연애담을 넘어 시대 하나가 같이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의 흔적이 남아 있던 사이공의 어린 시절.
1975년의 패망.
학생운동과 감화소.
새 체제에서 판사가 된 젊은 여자와의 인연.
가족이 모든 것을 잃어가던 시기.
한밤중에 올라탄 탈출선.
호주의 난민수용소.
미국 정착.
학교와 직장.
한국인 여자와의 동거.
결혼.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돌아간 베트남.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꽝은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
좋게 표현하면 자유분방했고, 나쁘게 표현하면 도무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꽝과 오래 지내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이나 연애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시내 식당에서 은퇴한 꽝을 우연히 마주치면 젊은 시절 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겪은 사람.
배 한 척에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났다가 수십 년 뒤 다시 그 나라로 돌아간 사람.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어디에 있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냈던 사람.
그게 내가 기억하는 꽝이다.
이제 꽝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하지만 가끔 옛날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만큼은 예전 직장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그럴 때면 나도 웃는다.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는 나라까지 바뀌었는데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꽝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그랬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찾아다니며 꽝의 긴 세월도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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