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냄새하나로 끝나버린 비밀
향수 냄새하나로 끝나버린 비밀
와이프는 나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키는 164센티미터 정도였고 체중은 60킬로그램쯤 나갔다.
그리고 그런 와이프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거의 한몸처럼 붙어 다닌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송희경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국민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같이 학교에 다니고, 함께 웃고 울며 성장한 세월만 따져도 보통 친구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친구라기보다는 자매에 가까웠다.
희경은 와이프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체중은 비슷했지만 전체적인 체형은 와이프보다 조금 늘씬한 편이었다.
희경의 남편은 반대였다.
희경보다 키가 작았고 체격도 왜소했다.
성격은 순하고 착했다.
그런데 희경의 결혼생활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는 듯했다.
결혼한 지 벌써 십 년이 되어가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일부러 갖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한 것인지는 나도 정확히 몰랐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희경의 남편은 지질학자였다.
연구사업 때문에 출장이 무척 잦았다.
어떤 때는 일 년 내내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자연히 희경은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남편이 장기간 출장을 떠나면 희경은 툭하면 우리 집으로 왔다.
아침에 왔다가 하루 종일 와이프와 놀고 저녁이 되어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날도 흔했다.
그래서 나 역시 희경을 특별한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 늘 드나드는 와이프의 오랜 친구.
그 정도였다.
다만 희경의 얼굴을 가끔 바라보고 있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그늘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와이프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와이프가 대놓고 물었다.
“희경아.”
“너 남편이랑 한 달에 몇 번이나 하니?”
희경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일 년에 열 번이나 되나 모르겠다.”
와이프의 눈이 커졌다.
“뭐?”
그리고 곧 장난스럽게 웃었다.
“얘.”
“당장 이혼해.”
“이혼하고 나랑 내 남편 나눠 먹으면서 살자.”
“하하하.”
희경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원래 그런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다.
나는 옆에서 듣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농담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은 약 일 년 전에 시작됐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와이프가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을 가방에 넣는 모습을 보니 어디를 다녀오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희경이는?”
그리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디 가?”
와이프는 짐을 꾸리면서도 총알처럼 대답했다.
“응.”
“희경이는 남편 왔대.”
“그리고 나는 엄마랑 춘천 이모한테 갔다 오려고.”
“이모가 조금 아프대.”
나는 갑자기 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부터 걱정됐다.
“그러면 나는 밥 어떻게 먹어?”
와이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희경이한테 부탁했어.”
그 말을 남기고 와이프는 정말 도망이라도 치듯 서둘러 집을 나갔다.
그렇게 집에 혼자 남았다.
와이프가 떠난 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슬슬 배가 고팠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을 생각으로 주방으로 가려는데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희경이었다.
그녀는 음식까지 이것저것 싸 들고 왔다.
“어머.”
“뭐 하세요?”
나는 조금 미안했다.
평소에도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여자였지만 굳이 내가 혼자 있는 날까지 음식을 챙겨올 필요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희경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와이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여자로 의식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잠시 바라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머리 모양부터 평소와 달랐다.
옷차림도 평소 우리 집에서 와이프와 편하게 놀 때와는 조금 달랐다.
평소보다 훨씬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다더니 오늘은 제대로 꾸몄나 보네.’
그래서 말했다.
“남편분 돌아왔다던데.”
“이렇게까지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데요.”
희경은 웃었다.
“어머.”
“지연 아빠가 어디 남인가요?”
“선아하고 나는 자매 같은 사이인데.”
그러면서 음식을 식탁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혼자 드시면 밥맛도 없을 것 같고.”
“제가 같이 먹어드릴게요.”
그런데 음식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희경은 러시아산 보드카 한 병까지 꺼내놓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이것까지?”
희경은 자기 남편이 피곤해서 먼저 밥을 먹고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사실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반대로 와이프와 희경은 술이 무척 셌다.
두 사람이 마음먹고 마시면 양주 두 병 정도는 어렵지 않게 비웠다.
나는 보드카 잔을 입에 가져갔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희경의 속도에 맞춰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희경은 정말 혼자서 독한 보드카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다.
시간이 지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말투도 조금씩 느려졌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갈게요.”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겠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팔을 잡아 부축하려고 하자 희경은 괜찮다며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면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결국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안 되겠어요.”
“여기서 좀 쉬었다 가세요.”
희경을 부축해 소파에 눕혔다.
그때였다.
희경이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아.”
“사실 남편 돌아왔다고 희경이한테 거짓말했거든여.”
나는 순간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하지만 희경은 히히 웃을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다시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빨리 쉬어요.”
“TV 끌게요.”
나는 TV를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희경이 혀가 꼬인 목소리로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희경의 옷차림.
굳이 음식을 싸 들고 찾아온 것.
보드카까지 준비해온 것.
그리고 방금 했던 이해하기 어려운 말.
그 모든 것을 하나씩 이어보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희경이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나를 유혹하려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희경이 보였다.
희경은 소파 등받이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옆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나는 문틈에서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와이프 옆에서 수다를 떨던 친구로만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이상할 만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심장이 빨라졌다.
그 순간 문득 오래전 와이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내 사랑이 진짜인지 꼭 한번 시험해보겠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차가워졌다.
‘잠깐.’
‘이거 혹시 덫 아니야?’
와이프가 희경과 짜고 나를 시험하는 것이라면?
그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이미 잠은 달아나버렸다.
눈은 말똥말똥했다.
조금 전 소파에서 본 희경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이불을 덮었다가 걷었다.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그렇게 뒤척이는 동안 어느덧 새벽 세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희경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자는 척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뒤 침실 방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희경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발소리가 멈췄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친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희경은 무언가 화가 난 사람처럼 몇 번이나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대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눈을 뜬 사람처럼 말했다.
“가시려고요?”
그리고 일부러 마른 하품까지 했다.
희경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서자 희경의 빠른 호흡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괜찮겠어요?”
희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네.”
그리고 조금 서운한 듯 덧붙였다.
“모델처럼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까.”
“내가 여자가 아닌 것 같아서 못 있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간신히 붙잡고 있던 긴장이 무너졌다.
나는 희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삐졌어요?”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술 취한 사람한테 함부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
희경이 순간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하던 경계가 무너졌다.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의 남편.
그 두 이름 사이에는 분명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희경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로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희경은 더 이상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그것이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그날 이후가 시작이었다.
희경은 갑자기 우리 집에 오는 횟수를 크게 줄였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사람이었다.
와이프와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가 저녁이 되어 돌아가던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우리 집 방문을 피했다.
대신 우리 둘에게는 다른 장소가 생겼다.
희경의 어머니가 사는 집이었다.
사정이 맞는 날이면 그곳에서 만났다.
어떤 때는 거의 매일 만났다.
바쁘거나 여건이 맞지 않으면 하루를 건너뛰고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관계는 계속됐다.
오히려 비밀이라는 사실 때문에 서로를 향한 집착은 더욱 커졌다.
와이프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년이 요즘 왜 이러지?”
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애인 생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하지만 와이프는 희경에게 굳이 전화를 걸어 예전처럼 집으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때 이미 와이프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향수였다.
희경이 사용하던 향수 냄새.
늘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으니 와이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향이었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해 집으로 들어왔을 때 와이프는 내 몸에서 그 향을 맡았다.
나는 몰랐다.
희경도 몰랐다.
하지만 와이프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날부터 와이프는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를 미행했다.
그리고 결국 나와 희경이 희경 어머니의 집을 드나드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와이프는 날짜까지 기록했다.
사진도 찍었다.
언제 들어갔는지.
언제 나왔는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났다.
시작은 향수 냄새 하나였다.
그 작은 흔적 하나가 우리가 숨기고 있던 모든 것을 끌어냈다.
와이프의 분노는 나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경에게 받은 배신감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국민학교 때부터 수많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이었다.
자매처럼 지냈다.
결혼하고 나서도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런 친구가 자신의 남편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와이프는 자신의 앨범을 꺼냈다.
그 안에는 희경과 함께 찍은 사진이 수없이 많았다.
어린 시절 사진.
학생 시절 사진.
젊었을 때 함께 놀러 갔던 사진.
결혼 후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와이프는 그것들을 전부 꺼냈다.
그리고 모두 불태웠다.
사진이 타면서 두 사람의 오랜 세월도 함께 사라졌다.
그날 이후 와이프와 희경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희경과 내가 몰래 만나던 시기에 희경은 임신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결국 희경은 내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다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희경은 나를 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내가 연락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처럼 돌아갈 생각도 없다고 했다.
희경이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자신은 내 와이프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믿어준 친구의 마음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배신했다고 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친구의 마음을 후벼 파는 여자로 살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어느 밤이었다.
음식을 들고 찾아온 아내의 친구.
식탁 위에 놓인 보드카 한 병.
그리고 술에 취해 소파에 누웠던 여자.
그날 내가 방문을 닫고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희경은 여전히 와이프의 가장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와이프의 앨범 속 사진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자매처럼 지냈던 두 여자도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한번 넘어버린 선은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향수 냄새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불에 타 사라진 사진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에는 나와 희경 사이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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