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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 이름도 묻지 않은 여자와 보낸 엿새

주소야 (1.♡.146.200) 2 150 0 0 2026.10.04

그믐밤, 이름도 묻지 않은 여자와 보낸 엿새


​칠흑처럼 캄캄한 그믐밤이었다.

달빛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밤하늘 아래에서 나는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폐 속에 가득 들어찬 연기를 천천히 입 밖으로 밀어냈다.

후우.

희뿌연 담배 연기는 잠시 내 얼굴 앞에서 형태를 이루는 듯하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몃스몃 흩어져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오래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오 년 전이었던가.

그때 나는 내게 물었었다.

너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도 나는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가.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열아홉의 혈기는 내게 축복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온몸의 껍질을 뒤집어 먼지가 잔뜩 밴 담요를 털어내듯 퍼억, 퍼억, 그렇게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눈앞에는 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 너머에는 회색빛 미래가 있었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글자를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에는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온몸에 휘발유라도 들이붓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잣거리 한복판으로 걸어가 그대로 불을 붙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곤 했다.

거리에는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뻐억.

뻐억.

단단한 바닥을 짓밟는 군홧발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도서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려다보면 교정에는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다.

누군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누군가는 달렸다.

그런데 나는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었다.

책은 표현하기조차 힘든 허접한 무엇이었다.

슬픔이었다.

절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초라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왜 이렇게 초라하고 유치한 몰골로 숨을 죽이고 있는가.

나는 왜 내 가슴을 스스로 조금씩 잘라먹으며 살아가는 불쌍한 묵조가 되어버린 것인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내 인생은 정말 내 것인가.

내게는 주먹도 없는가.

힘도 없는가.

높이 외칠 목청 하나조차 없는 것인가.

그날도 술을 마셨다.

마셨다는 표현보다는 들이부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포기와 절망을 술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썩기를 거부하는 몸뚱이는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속이 뒤집혔다.

위장이 뒤틀렸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다시 목구멍을 타고 기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백열등 하나가 간신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주저앉았다.

내 인생이 그 백열등보다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동전 두 닢짜리 전구보다도 못한 인생이었다.

야비하고.

추접하고.

비겁했다.

나는 주먹으로 땅을 두드렸다.

퍽.

다시 한번.

퍽.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하지만 전봇대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당연히 내 몸이었다.

나약한 살가죽이 찢어졌다.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나는 그 피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죽을까.

이렇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지만 죽음보다 더욱 역겨웠던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정말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삐죽삐죽 고개를 들었다.

공포였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정작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이 더욱 싫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 고요한 골목의 가로등 밑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 것인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슬픔도 먼지처럼 걸러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눈물을 계속 흘리면 언젠가는 슬픔이 전부 빠져나갈까.

아니.

차라리 눈을 뽑아버리면 지금의 아픔까지 볼 수 없게 되는 것일까.

나는 패배자인가.

장외자인가.

아니면 세상에 밀려난 가련한 약자인가.

언젠가 누군가 내 인생을 심판한다면 나는 어디에 서서 나 자신을 변론해야 하는가.

그때도 나는 세상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결국 비열하게 도망쳤던 인간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인가.

그때였다.

등에 무언가 닿았다.

따뜻했다.

작고 부드러운 손바닥이었다.

구토 때문에 아랫배가 뒤틀려 나는 허리를 굽힌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내 등을 누군가가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토닥.

토닥.

이상하게 편안했다.

하지만 그 편안함조차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하지 마세요.”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난 가치 없는 패배자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토닥거리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움직였다.

토닥.

토닥.

“싫단 말입니다.”

나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싫다구요.”

“난 도움을 받을 가치도 없는 파렴치한 인간이란 말이에요.”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결국 짜증스럽게 물었다.

“대체 누군데 이러시는 거죠?”

“누구세요?”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조금 전 토해놓은 토사물을 깔고 앉는 것조차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가의 화장은 검게 번져 있었다.

얼마나 번졌는지 눈인지 검은 색안경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입가에 발랐던 연분홍색 립스틱도 번져 턱 언저리까지 얼룩져 있었다.

꼭 우는 광대 같았다.

나는 그녀를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머리는 좀처럼 기억을 꺼내놓지 못했다.

고개를 두어 번 휘휘 흔들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셨던 개천가 작부집.

그곳에서 내 옆자리에 있던 여자였다.

“그만하세요.”

나는 말했다.

“고마워요.”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왜 따라 나오셨어요?”

침묵.

나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난 이제 가렵니다.”

“가고 싶어요.”

그때 여자의 손이 움직였다.

대답 대신 그녀는 내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었다.

생각보다 힘이 있었다.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내 몸뚱이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녀에게 끌려가는 것인지 스스로 따라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비틀거리며 걸었다.

걷는 동안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설핏하게 내려앉은 차가운 안개라도 눈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목이 말랐다.

입안에는 잘게 부순 자갈을 한 움큼 집어넣은 것처럼 까끌까끌한 통증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천장.

쥐오줌 자국.

군데군데 박혀 있는 파리똥 자국.

내가 매일 바라보던 천장이 아니었다.

‘어디지.’

고개를 돌렸다.

눈앞으로 사발 하나가 들어왔다.

푸른색 줄 두 개가 둘러져 있었고 그 사이에 한자로 복(福) 자가 적혀 있었다.

사발을 들고 있는 손도 보였다.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 말라 있었다.

나는 순간 빈 사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에는 물이 들어 있었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가 어디죠?”

나는 사발을 받아 급하게 물을 마셨다.

입안을 헹구듯 물을 들이켰다.

물이 식도를 전부 넘어가기도 전에 다시 말을 내뱉었다.

예절이라는 것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미안합니다만.”

“여기가 어디입니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얗게 핏기가 빠진 얼굴이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내렸다.

그 단정한 머리를 얼굴 위에 뒤집어씌워놓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오히려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머릿속에 흩어진 단어와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기 시작했다.

술집.

골목.

구토.

가로등.

그리고 등을 두드리던 손.

그 모든 기억이 이어질 즈음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방 한쪽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물이 빠져 색이 바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 자락을 잡아내렸다가 다시 놓았다.

무릎을 세웠다가 접었다.

그러다가 할 일이 없으면 방바닥에 붙은 작은 얼룩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문득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미안해요.”

잠시 망설였다.

“전 돈이 없는데.”

“어쩌죠.”

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무안해졌다.

나는 아직도 몸을 덮고 있던 이불자락만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상했다.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왜 나를 데려왔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리 오세요.”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손짓으로 그녀의 팔뚝 언저리를 잡았다.

조금 당겼다.

여자는 거부하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팔 하나를 내어 그녀의 머리 아래에 넣어주었다.

그녀의 고개가 내 이두박근을 넘어와 턱 가까이 떨어졌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던 다른 손을 그녀의 등에 올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며칠이었을까.

몇 시간이었을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문 하나가 있었다.

방이라고 해봐야 두 평이나 될까 싶은 좁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나갈 힘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시간을 세는 것도 포기했다.

시계도 보지 않았다.

해가 떴는지 졌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밥을 먹은 횟수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열일곱 번쯤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닷새였을까.

엿새였을까.

아니면 이레였을까.

방 한쪽에는 뚜껑이 달린 요강이 있었다.

소변도 그곳에서 봤다.

대변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먹고.

누웠다.

잠들었다.

깨면 다시 누웠다.

그 좁은 방 안에서 세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밖에서는 누군가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학교에 갔을 것이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소리쳤을 것이다.

군홧발이 뛰었을 것이다.

최루탄 연기가 퍼졌을 것이다.

책상 위에는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와는 관계없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묻지 않았다.

왜 나를 골목에서 데려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왜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지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서로의 체온에 기대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 역시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욕망 때문이었는지.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절망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체온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좁은 방 안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녀의 바랜 원피스.

낡은 이불.

복(福) 자가 새겨진 사발.

천장의 쥐오줌 자국.

방바닥의 작은 얼룩.

그리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

그것만이 내가 기억하는 세상의 전부였다.

가끔 그녀는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살고 싶은 것인지 죽고 싶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인간이었으니까.

그녀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골목에서 주워온 술 취한 청년이었을까.

잠시 불쌍해서 데려온 손님이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자신의 절망을 잊기 위해 나라는 낯선 인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그녀도 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 시간이 아직까지 내 안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낯설었고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쓸쓸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끔 그 밤을 생각한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믐밤.

백열등 아래에서 토하고 울며 세상을 저주하던 열아홉의 나.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거리던 작고 따뜻한 손바닥.

토닥.

토닥.

그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그날 어디로 갔을까.

정말 죽었을까.

아니면 또다시 비겁하게 살아남았을까.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믿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우느냐고도 하지 않았다.

왜 술을 그렇게 마셨느냐고도 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살아야 한다는 충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등을 두드렸다.

어쩌면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거창한 위로나 답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람의 손 하나.

따뜻한 체온 하나.

그리고 내가 아직 완전히 버려진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말없이 알려주는 누군가의 존재 하나.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을까.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이상하게 내 기억 속 그녀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언제나 그 좁은 방 한구석에 앉아 있다.

물빛이 바랜 원피스를 입은 채.

무릎을 세웠다가 접으면서.

방바닥의 얼룩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문지르면서.

그리고 내가 바라보면 언제나 그랬듯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는 얼굴로.

지금도 그곳에 가면 그녀가 있을 것만 같다.

그 희미한 얼굴 그대로.

그 낡은 원피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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